“여기이려나?”
팔각치마 밑에 스패츠 입은 20대 여성의 목소리다. 여동생이 말해 준 그 친구를 찾는다. 아픈 사람의 고민을 들어준다는 걸 일로 삼는 양선은 그렇기에 구로동 K병원에 들렀다. 응 맞아. 이 병실이랬어. 여동생은 거짓말을 하는 녀석은 아니니까. 그렇게 1인 병실 문이 열린다.
“…….”
눈썹은 처지고 눈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머금을 것 같고 입은 뚱하게 내민 소녀가 아랫도리를 담요로 덮고 다소곳이 앉아있다.
“안녕?”
소녀는 반응이 없다. 양선은 고개를 요리 돌리고 저리 돌려도 알 수가 없다. 아니, 그 전에 소녀가 양선을 알 리가 없다.
“에헤헤….”
양선이 어색하게 웃어보이며 말을 꺼낸다.
“제연이라고 알지? 언니 다람이라고 해. 그럼.”
바른편 손은 뒤로 펴면서 불꽃을 켜보이고, 그른편 손은 승리의 브이자를 뉘어 왼쪽 눈에 가져다 대며 말한다.
“잘 부탁한다☆”
한 쪽의 불꽃이랑 한 쪽의 애교를 본 소녀가 놀랐는지 동태와 같던 눈을 붕어처럼 치켜뜬다. 스물이 넘은 아가씨는 이내 쑥쓰러웠는지 내밀었던 몸을 도로 뒤로 당겨 넣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겸연쩍게 웃는다.
“걔 원래부터 말이 없던 애야. 먼저 말을 거는 법이 없어. 애들 뭐 하느라 몰려 있으면 뒤에서 뻘쭘하게 지켜본다고.”
집에서 들은 동생의 팁이다. 안 그래도 말수가 없던 녀석인데 이번에 사고를 당하면서 충격까지 더해 말수를 아예 잃은 모양이다. 하지만 천하의 양선이 누구냐. 옳지 못함은 눈 감아줄 수 없다.
“놀랬지? 더 재미있는 거 보여줄까?”
그리고 자신이 매고 있던 스카프를 풀어 냅킨 펴듯 털어내자, 스카프에 그려져 있던 나비 수백 마리가 병실로 날아올라 천장을 메운다. 소녀의 눈이 개구리 눈처럼 커진다. 이에 양선은 손가락을 튀기면서 나비를 도로 스카프로 불러모은다.
“어때? 이제부터 언니랑 친구처럼 노는 거야. 좋지?”
소녀의 고개가 위아래로 오간다. 대충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싫지는 않은 눈치다. 좋아, 성공이야. 그렇게 양선과 소녀는 오랜 시간 동안 내내 꽃을 피운다. 하지만 밤이 다 되어갈수록 다른 면회객은 오지 않는다. 어떻게 된 걸까. 보호자라도 있었으면 차라리 더 나았을텐데.
그리고 하루 이틀이 지났다. 소녀는 양선이 매일 다른 모습의 이야깃거리를 가져왔기에 더 이상 외롭지도 지루하지도 않았다. 양선은 언제나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고, 하루 하루가 즐거웠다. 하지만 그 병실에는 양선과 소녀 말고는, 도대체 들어오는 사람이 하나 없었다.
“예전에 교무실에서 담임 일 도와드린 적이 있는데, 걔네 부모님 말고 다른 친척이 없다더라고? 뭐, 나도 이제 다른 친척이라고는 없지만. 그래도 어디 명절날 만날 사람도 없어서 그래 보이더라.”
동생의 또 다른 팁이었다. 가족이랑 친구 말고는 면회를 올 사람이 없다면, 친척도 없고 학교 친구들이랑도 가깝지 못하고…부모님은 왜 안 오시는걸까.
“저 여자애 부모님은, 그 사고 때 돌아가셨어요.”
어, 뭐라고?
“안 그래도 다른 가족도 없고 친구들도 적어서 걱정인데…부모님까지 가셨으니 입을 여는 일이 없어요. 선생님께서 자주 들르셔서 달래 주시는데, 조금만 더 마음을 주셔야 빨리 나을 수 있을 거에요. 그러니 좀 잘 부탁드릴게요.”
아, 그랬구나. 가엾어라. 잠시 눈을 감고 자기랑 동생의 처지를 생각하고 겹쳐 본다. 자신도 부모님이랑 어려서 헤어졌으니 가슴이 멘다. 하늘이 표정을 찡그리고 형광등이 침울해진다. 음…아니지. 그래. 일단 언니로서, 동생을 돕는 언니로서 약한 모습 보여주는 거 아니지. 이 녀석에게는, 희망을 보여줘야 해. 저 녀석이 고치 한 마리라면 나는 저 집 부모님 대신 고치를 품어서 날려보내야만 해.
“자, 오늘은 뭘 보여줄까? 아, 그렇지.”
병실로 돌아와 소녀를 맞이한 양선이 손가락을 튀긴다. 소녀의 눈 앞에 원래 보이던 병실이 사라진다. 근데 웬걸. 이건 구름만 가득한 하늘 아닌가. 소녀는 병침에 아랫도리를 뉘이고 있는 게 아니다. 바닥은 없다. 그렇다. 소녀는 양선과 함께 하늘을 날고 있던 것이다.
“날자, 나는 거야. 바닥을 딛고 살 수 없다면, 날아보는 거야. 날아 보자. 날아 볼까? 언니랑 같이. 구름 속을 헤집고, 날아다니는거야.”
소녀의 눈에서 눈물이 맺혀 흐른다. 양선이 소녀를 와락 껴안는다.
“아무도 없었을거야. 친구랑도 말 한 마디 붙이기 힘들고, 가족도…만나기 힘들고. 그래서 발을 디딜 곳이 없었을거야. 그럴 때는 발을 딛지 말고, 날아다니는거야. 저 높이….”
소녀의 가슴은 안길 이 없던 그 어느 때보다 따뜻했다. 마치 정말로 겨드랑이와 어깨뼈 뒷쪽 갈비랑 이어지는 곳 어디선가에서 날개가 돋는 것과도 같았다. 정말로 구름 위로 단 둘이 날아가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숨고만 싶었다.
그리고 또 하루 이틀이 지났다. 양선과 소녀의 꽃밭은 역시나 둘 말고 찾는 이가 없었다. 그래도 그 날의 양선이 너무나 강렬했던 것일까. 소녀는 이제 양선이 다른 것보다 자신을 날려보내기를 원한다. 날자. 나는 거야. 발을 디딜 곳이 없어. 그래 발을 딛지 말고. 날아다니는거야. 저 높이. 그렇게 소녀는 언젠가 날아간다는 생각만을 수어 번 반복한다. 그리고 또 어느 날.
“자, 오늘도 날아보자. 언니랑 같이 날아볼까?”
누워 있던 소녀가 주사바늘을 뽑고 두 팔의 힘으로 별안간 스스로 일어난다. 두 팔이 한껏 붉어지고 바늘 구멍에서 피가 흘러나오지만 몇 분의 투쟁. 자기 자신을 딛고 있던 바닥과의 투쟁 끝에 지금까지 설 수 없던 두 다리로 일어난다.
“어…어어? 얘야?”
소녀의 입에서, 그동안 황궁 입구마냥 굳게 닫혀 열리지 않던 소녀의 입이 열려 양선을 맞는다.
“언……………니.”
양선은 지금까지 자신이 보지 못한 풍경에 놀라 소녀를 지켜볼 따름이다. 몇 걸음 걷지 못했던 두 다리를 통해 땅과 맞서던 소녀는 이어 몇 걸음만에 바닥에서 발을 떼어낸다. 그리고 바닥이 없는 빈 빗면을 아무렇지 않게 저벅저벅 걷는 소녀. 이윽고 창문 지지대에 발이 닿자 소녀는 양선을 향해 다시금 마주본다.
“고…마…워……요.”
소녀의 얼굴에는 그 때 그 날처럼 눈물이 맺혀 흐르고 있었다. 아니, 지난 번 그 날하고는 다르다. 이번엔 소녀가 미소를 지으며 양선을 바라본다. 이윽고 소녀는 뒤로 몸을 날려 잠시 밑으로 떨어지더니, 도로 하늘 높이 솟구쳐 날개를 뻗고 구름 위로 숨는다. 양선은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바보처럼 입을 벌리고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다가, 이윽고 입꼬리를 내리면서 소녀의 가는 길을 축복한다. 소녀의 마지막 모습처럼 양선도 환히 웃는다. 양선은 창문 밖을 바라보면서, 이런 말을 남길 따름이었다.
“진짜 숨을까. 했더니 진짜로 숨었다. 푸후훗.”
이어 양선은, 조신한 아가씨라는 모습을 깨고, 눈물을 흘리며 누워 큰 웃음을 터뜨린다.
(원문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