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나아질 수 있을까. (1) 서문

노들 영산

세상은 나아질 수 있을까. (1)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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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의 나는 더 나은 세상에 살기를 강하게 바라고 있었다. 그때도 지금도 간절히 원하던 세상의 모습이 분명히 있었다.
그리고 2005년의 세상은 그 모습과 한참 동떨어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2025년의 세상은 2005년의 세상보다 나아졌는가?

나아지지 않았다.
그때 바라던 세상의 모습에서 오히려 멀어진 게 아닐까. 비통하다.

어떤 세상을 바랐는가?

트위터에 이렇게 타래로 썼다. 전문은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세상을 물려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영어공부 열심히 안 해도 사는데 지장 없고 불이익 안 받는 세상을요.
자기를 닦달 안 하고 좀 게으름 피우고 공부 좀 안 해도 밥벌이 지장 없는 세상을요.
뭔가를 열심히 안 갈고 닦았고 능력이 떨어진다고 해서 부당한 차별을 받는 일 없는 세상을요.
자기 원래 목소리, 신체 특성, 외모, 장애, 비언어적 소통능력, 상식의 차이, 사회성숙도, 성 정체성, 성 지향성, 지역 정체성, 주 사용 언어, 민족 및 인종 정체성 그대로 살아도 그걸 빌미로 차별 받는 일 없는 세상을 살 수 있기를 바라고 바랍니다.

그래서 이번에, 이렇게 진단하고 세상이 나아가야 하는 길을 제시하려고 한다.

앞으로 세 가지 의제로 진단하려고 한다.

  1. 한국 사람들, 영어 공부에 목숨 걸지 않아도 학교생활이나 사회생활에 불이익을 안 받는 세상을 살고 있는가.
  2. 한국 유청소년들, 학원 뺑뺑이 안 돌아도 되는 세상을 살고 있는가.
  3. 한국 사람들, 자기 몸과 정신적 특성과 정체성을 빌미로 부당한 차별을 받지 않는 세상을 살고 있는가.

이런 세상을 도대체 왜 바라게 되었는가

2005.2.14

그날은 2005년 2월 14일이었다.
난 아직 이날이 오기까지 벌어진 일련의 과정을 한 단어로 어떻게 정리해 말할 수 있는지를 모르겠다.

타임라인 최상단: 내가 거친 학령기(학생 시기)

나는 강남(서초구)에서 초중고를 모두 졸업했다.
그러나 초등학교는 노들나루(동작구)에서 시작했다. 노들나루에서 5학년 1학기까지 마치고 남은 3개 학기부터 강남 학교에 전학 가 소속되었다. 강남에서는 학교폭력도 없고 동급생이 동급생을 함부로 터치하지도 않고 학교 수업에 그저 적극적으로 매진하면 꽃길을 걸을 수 있을 줄로 알았다.

중학교는 당시 남자 중학교로 입학하였다. 처음 몇 주간은 평화롭고 실제로 즐거운 학교생활을 했다.

그리고 아직 봄이 채 지나가기도 전에, 같은 반 동급생을 괴롭히고 다니는 동급생이 날 성적으로 모욕하는 낙서를 그리고 비웃는 사건을 당했다. 그리고 그 동급생에게 주먹으로 볼따구를 맞았다. 그 뒤로 학교 동급생은 나를 막 괴롭히고 때려도 되는 샌드백으로 간주하였다. 그렇게 난 학교폭력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특목고(외고)로 진학하면 학교폭력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일주일 중 4일을 학교와 학원에 다 갖다 바쳐도 참고 견뎠다.

2004년 여름방학: 고난의 시작

중학교 3학년 1학기 기말고사가 이례적으로 다른 학교보다 늦게 끝났다.
원래 중간고사 기말고사 끝나고 한두 주는 시험 준비 고생 많았다고 학원도 안 가고 쉬고 노는 휴식기였다. 다른 학교보다 시험시기가 이른 편이어서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시작 두세 주 전에 열심히 내신시험에 매진하고, 이후 학원 정상수업이 시작하기까지 제법 긴 기간을 원 없이 놀던 시기였다.

그러나 중학교 3학년 1학기 기말고사는 휴식기를 가질 수 없었다. 늦게 끝난 학교는 곧바로 학원 정상수업 시기로 옮겨가기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주 52시간에 육박하는 외고반 학원 생활을 기약 없이 이어가야 했다. 지금 기억이 맞다면 그때 영어 수업 비중이 컸다. 영어 실력이 시험을 볼 수 있을 만큼 잘 오르지 않았다. 지쳤고 영어 공부 그만 하고 싶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외고 진학 시험은 불합격으로 끝났다. 그리고 난 휴식기를 가지지 못했다.

그리고 외국어고 진학은 안 좋게 끝났다.

직후 다수 학원은 중학교 마지막 겨울방학부터 고등학교 진학하기 전까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역시 주 3일 하루 종일 수업을 들어야 하는 학원으로 옮겨갔다. 수업으로 끝이 아니고, 거기서 매일 주는 숙제는 학원수업 없는 날을 자습시간에 다 바쳐도 끝나지 않았다. 단어 시험에 외워야 하는 하루 단어 양은 살인적이었고, 수학 문제는 도저히 풀리지 않았고, 국어 교재 숙제 진도는 나가지 않았다.

영어 공부는 정말 그만 하고 휴식기를 가지고 싶었다. 마지막 휴식기를 가지고 남들 챙겨보는 애니 게임 챙기지 못하고 밀린 지 9개월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공부 그만 하고 쉬어도 된다고 말해 주지 않았다. 더욱 열심히 공부하고, 쉼 없이 공부하러 나가고, 숙제 빵꾸 내는 일 없어야 한다고 다그치고 있었다.

그때 학교와 학원은 체벌을 당연한 교육수단으로 쓰고 있었다. ‘잘못했으면 당연히 회초리를 맞는다’가 마땅히 받아야 하는 징벌이었다. 학교에서는 벌점제도와 체벌을 병용하고 있었다. 옐로 카드(벌점)를 받고 엎드려 뻗쳐를 받고 매까지 맞는 일을 어렵지 않게 봤었다. 당시 학원 반에 들어오는 영어 선생은 단어 시험은 5개 이하 틀린 것만 통과로 인정하고 그 이상 틀린 것은 틀린 갯수만큼 손바닥 매를 때렸다. 그리고 의지드립을 신봉하였다.

도저히 학원에서 주는 숙제를 다 끝마쳐서 낼 수 없었다. 난 그 단어 시험을 거의 통과하지 못했다. 5개 이하에서 1개를 더 틀린 날도 어김없이 회초리가 이어졌다. 그 선생에게서 격려의 말을 듣지 못했다. 단어 시험은 통과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했고, 칭찬받을 일이 아니라고 했다. 계속해서 반 학생의 태도를 나쁘다고 비난하였고 개선되지 않으면 따로 불러서 크게 두들겨 패고, 다시는 사람 대접하지 않고 대우하지 않겠다고 했다.

딱 한 번, 단어 시험을 기적적으로 통과했다. 그 선생은 ‘너 웬일이냐’라고 말했다. 어떻게 통과했는지 모르겠다. 다음 단어 시험은 통과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나를 두고 ‘한 번 반짝하는 것이 아예 반짝하지 않는 것보다 나쁘다’라고 다시 낙인을 찍었다.

졸업한 중학교에서 학교폭력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었다. 외고는 불합격하였고, 어떻게든 그 중학교의 내 모습을 기억하고 똑같이 학교폭력을 가하는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다. 서울시청 4km 이내 인문계 고등학교에 배정받는 신청을 받았다. 원가정에 그 신청이라도 하게 해 달라고 했지만 ‘가까운 학교나 다녀라’라는 대답만을 들어야 하였다. 그나마 중학교 출신자가 적게 가는 지역 고등학교를 배정받는 것만을 바라야 했다.

그렇게 2005년 2월 14일이 되었다.

그러나 자동배정된 학교는 그 중학교 출신자가 많이 배정되는 고등학교였다. 절망적이었다. 그때 고등학교에 등록하는 절차가 있었다. 그것을 하러 가지 않았다면 진학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왜 안 하고 도망칠 생각을 하지 않았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날도 학원을 가는 요일이었다. 그때 학원에 20분 가량 지각했었다. 영어 시간에 어떤 숙제를 마치지 못했었고 상담실로 나오라고 명받았다. 쉬는 시간이 되었다. 그 영어 선생에게 끌려가 취조실처럼 생긴 같은 상담실로 갔다.

“너는 이 학원에서 지도하지 않고 잘라버릴 거야.”

그렇게 엉덩이 회초리 다섯 대를 맞았다. 서럽게 울면서 교실에 들어갔다. 다음 시간은 수학 시간이었다. 수업 내용이 들리지 않았다.

그 이후 영어공부를 전혀 할 수 없었다. 영어 과목 자체가 내 앞길의 지뢰처럼 나타나 나를 괴롭혔다.

난 정말, ‘이제 영어 공부 많이 했으니 쉬어도 된단다.’라는 말을 인생 내내 한 번이라도 듣고 싶었다. 한 명이라도 그렇게 말해 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저 시기를 그래도 나쁘지 않게 묻어둘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앞으로 이어갈 내용에 대해

앞으로 여유가 되면 앞서 썼던 ‘세 가지 길’을 한 가지씩 한 포스트에 담아 올리려고 한다. 물론 여기까지 읽고 나를 사회 부적응자라고 비웃을 사람도 있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러나 세상은, 모든 사람이 최대한 적응하고 보호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글을 비웃을 것이라면 이 글에 대해 어떤 평가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번 서문을 쓰는데도 무척 지치고 힘들었다. 글을 어떻게 전개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어서 빠르게 척척 글쇠를 누를 수 없었다. 그럼에도 오늘이 그 날로부터 20년이 되는 날이기에 중요하게 여기고, 또 한 명이라도 이 글을 공감하고 뜻을 같이할 분이 나오기를 바라며 글을 이어가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