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 본 고향 산천: 노량진로 육교 5개소(영등포고 입구, 노량진역, 만양로 삼거리, 사육신묘 입구, 본동 가칠목 입구)

노들 영산

꿈에 본 고향 산천: 노량진로 육교 5개소(영등포고 입구, 노량진역, 만양로 삼거리, 사육신묘 입구, 본동 가칠목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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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그 많던 육교는 다 어디 갔을까

오늘날 서울에서는 보기 드물어졌지만 예전에는 보행자용 육교를 훨씬 많이 만날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건 자동차를 보행자(사람)보다 우선시하던 도로 교통 정책 때문이었을 겁니다. 돌배 만화일기에서 짚었듯 사람 나고 차 났지, 차 나고 사람 난 것이 아닌데 말입니다.

중앙버스전용차로란, 육교를 철거하는 운명과도 같은 존재

서울에서 육교가 줄어든 직접적인 계기는 중앙버스전용차로 확대 때문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2004년 7월 1일 실시한 버스 대개편(이하 ‘7·1조치’라고 하겠습니다)으로 다음과 같은 변화를 맞았습니다.

  • 서울 면허 버스노선번호가 일제히 바뀌고,
  • 티머니 교통카드를 도입하고,
  • 노선을 속성에 따라 구분하고 그에 따른 색상으로 도장됐으며(여기서 ‘지○염병 버스’라는 멸칭이 한동안 유행했습니다),
  • 주요 간선도로에 중앙버스전용차로가 완공돼 중앙차로로 버스를 넣었습니다.

이전부터 시범사업을 하던 천호대로 이외에 7·1조치로 3개 간선도로 노선에 중앙버스전용차로 정류장 및 차선이 준공돼 운영되었고, 그 중 강남대로는 원래 있었던 육교를 철거하고 U턴차선을 완전폐지하는 등 파격적인 조치가 이뤄졌습니다. 육교 철거가 중앙버스전용차로 신설과 항상 같이 실시된 것은 아니지만, 중앙버스전용차로가 부설된 서울 시내 도로 육교는 상당수가 철거되는 운명을 맞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노들나루에 세워져 있었던 육교들

소개: 이젠 1개소밖에 없지만, 90년대만 해도 한참 많았던

노들나루를 달리는 노량진로(옛 경인로)도 오늘날 중앙버스전용차로를 운영 중인데, 현대자동차 남부서비스센터 앞부터 노들역까지 이르는 구간에 육교는 사육신로 앞 1개소만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전인 1990년대만 하더라도 해당 구간에는 육교가 훨씬 많은 5개소나 있었습니다. 이를 카카오 지도에 나타내면 다음과 같습니다.

노들나루(노량진 수산시장부터 노량진역, 노들역까지)에 있거나 있었던 육교 5개소의 장소를 나타낸 지도. 서쪽부터 오름차순으로 A부터 E까지 표시했습니다.
  • A 지점: 영등포고등학교에서 대방역 방향으로 더 나아간 지점입니다. 노량진 수산시장 방향 지하보도가 가까운 지점이기도 합니다.
  • B 지점: 1호선 노량진역 앞입니다. 노량진역 2번 출구와 직접 이어졌기에 ‘노량진역 육교’ 또는 ‘노량진 육교’로 불렸으며, 지금도 남아 있는 수산시장 방면 육교와도 이어졌던 구조물이었습니다.
  • C 지점: 만양로 삼거리입니다. 지금은 컵밥거리가 조성돼 있는 구간이며, 예전에도 노량진에서 오락 및 외식업으로 흥하던 번화가 골목이 시작되는 구간입니다.
  • D 지점: 사육신묘 입구입니다. 이 글에서 소개드리는 육교 중 2025년 5월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육교입니다.
  • E 지점: 노들역 1번 출구입니다. 래미안트윈파크 준공 전 남아 있던 자연마을 ‘본동 가칠목’과 서울 나머지 지역을 잇던 유일한 통로였습니다.

현재는 국도 구간에서 빠졌지만, 한때는 노들나루를 달리는 이 구간이 1번 국도였고, 일제강점기엔 일본제국 내지(인천·목포·부산항 연계)와 아시아 대륙(남만주 방면)을 직접 잇는 유일한 구간인 적도 있었던 만큼 수없이 많은 자동차가 전적으로 이 길에 의존했어야 했을 겁니다. 사람이 그런 찻길을 평면으로 걸어서 건너려면 아찔하기 그지없기는 했겠지요.

위에서 붙인 로마자 지점별로 육교 이름을 임의로 붙여, 각 육교에 관한 소개 시간을 가져 보겠습니다.

※이후 소개드리는 육교 이름은 서울특별시청이나 국토부에서 공식적으로 붙인 이름이 아닙니다.

A 지점: 영등포고 육교

노들나루 고향 집에서는 가장 먼 지점으로 제 기억에서도 가장 흐릿한 지점입니다. 하지만 카카오 로드뷰에서는 2014년 촬영분까지 확인되는 엄연한 육교 지점이기에 소개합니다. 몇 년 전 대한제국 시대 개통된 하수도가 발견됐는데 그곳과도 가깝네요.

지금은 화단과 반려견공원으로 정비돼 있지만 90년대엔 생선가게가 늘어서 있었던 자리였습니다. 특히 수산시장 지하보도 입구가 가깝다 보니 이 근처는 노량진 수산시장의 연장선이었습니다. 그래서 버스나 자가용을 타고 달리기만 해도 생선 냄새가 눈앞에 아른거리던 기억이 어렴풋이 납니다.

B 지점: 노량진역 육교는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오늘 소개드리는 육교 중 가장 최근에 역사 속으로 사라진 지점입니다. 노량진을 처음 들르던 분들도 낯익은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지금은 엘리베이터를 설치했는데 정확히 그 자리가 육교 시작점이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육교가 있었을 때는 육교 위에서 자리를 깔고 노점을 여시는 분들을 자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중 기억나는 것이 지도를 파는 상인과 뻥튀기를 즉석에서 튀겨 파는 상인입니다. 90년대만 하더라도 길거리 상인은 물론 이동 슈퍼, 포장마차를 훨씬 쉽게 찾을 수 있었던 정겨운 기억이 선하네요.

ㄴ자로 이어진 지점으로 섬돌 몇 개를 더 오르면 경부선 철길을 건너는 육교로 이어집니다. 이 육교는 철도 과선교로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예전에는 이 길이 수산시장과 가장 가까운 보행로였지만, 왠지 모를 거부감이 들어 지나다니는 것을 꺼렸습니다. 노량진 수산시장 현대화 사업에 응하지 않은 시장 상인들이 천막농성을 이어가고 있는데, 예전에도 있었던 위협감이 증폭된 기분입니다.

육교 건너편까지가 심리적인 노량진역의 마지막 지점이었습니다. 건너편 바로 아래에 99년까지 오락실이 1개소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해당 오락실에는 ‘X세대 퀴즈’를 1기기 갖추고 있었는데, 그 게임이 해당 오락실에서 가장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1990년대엔 노들나루와 상도동을 아우르는 유일한 지하철역이 노량진역이었기에, 지하철 나들이를 마치고 돌아가기 아쉬울 때 들르면 좋은 오락실로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노량진역 및 노들역에서 가까웠던 오락실 이야기를 할 기회는 추후 가지려고 합니다.

노들나루를 떠나 살고 연이어 안 좋은 일을 겪으며 필사적으로 돌아갈 고향으로 노들나루를 찾았던 기억이 납니다. 버스에 도전하기 어렵던 때, 그곳으로 찾아가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1호선 노량진역에 내리는 것뿐이었습니다. 이후 9호선이 개통하고, 노들나루를 찾는 방법을 많이 개발했어도 이 육교는 노량진역을 지키는 문지기 역할을 했습니다. 노들나루에서 괴롭힘 안 받고 행복한 경험을 많이 가지던 시절을 그리며 탈출구로 노량진을 필사적으로 찾았습니다. 또 병역 복무 기간 자대 가는 출입구로 노량진역을 이용하게 되면서 그때마다 이 육교는 행복했던 과거로 안내하는 제제의 라임오렌지나무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2015년 철거 결정을 했을 때 나의 라임오렌지나무가 베이는 것만큼 가슴이 찢어지게 아팠습니다. 그리고 저뿐 아니라, 노량진에서 살았거나 드나들던 분들도 비슷하게 생각했었던 모양입니다. 같은 시기 1호선 및 9호선 노량진역 간 환승통로가 정식 개통되고, 이에 발맞춰 1번 출구로 향하는 횡단보도가 개통돼 편의가 늘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대대적으로 철거 기념 행사를 벌였고, 저도 약소하게나마 작별인사를 남겼습니다. 무슨 내용인지 기억나지는 않지만요.

정말 인생에서도 상당히 가까운 때까지도 올라갈 수 있었던 육교였고, 노량진을 자주 찾을 때도 당연한 듯 있었던 육교였기 때문에 가장 아련하고 그리운 육교입니다.

C 지점: 다운타운 육교

오랫동안 잊었다가 역시 카카오 로드뷰를 통해 떠올리게 된 구간입니다. 9호선 개통 즈음, 그리고 중앙버스전용차로 개통 즈음인 2009년을 전후해 사라진 것으로 추정합니다. 노들나루를 떠난 이후 노량진역을 빈번히 드나들게 된 것이 2009년부터였기 때문에 기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노량진역 일대에서 단연 ‘다운타운’으로 꼽을 수 있을 만한 삼거리입니다. 동쪽으로는 컵밥거리가, 남쪽으로는 벚나무 가로수 거리인 만양로가 시작되는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또 노량진에 마지막 남은 오락실 어뮤즈타운과 최근 사라진 정인오락실이 가장 가까운 삼거리입니다. 그 외 유수 학원과 식당이 이 삼거리를 중심으로 발달했습니다.

나중에 소개드릴 서점 ‘국민문고’와 피자몰, 그리고 단관극장 영화관도 이 육교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또 노들나루에 살았을 때 집에서 노량진역을 가려면 제일 먼저 만나는 구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전 노량진을 이 구간으로 기억하는 것이 가장 오래되고 친숙합니다. 육교 모양이 특이해서, 일반적인 ‘I’자가 아닌 ‘L’자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육교가 ‘I’자가 아닌 모양을 할 수도 있구나 하는 모범사례였는데, 어째서인지 육교 자체가 기억에 장기간 없었던 것이 무척이나 분하고 아프네요.

D 지점: 사육신묘 육교

박일하 구청장 취임 이후 ‘나의 자부심(自負心)’이라는 슬로건을 건 육교입니다. 인터넷에서는 ‘나 의자(椅子) 부심(←부숨)‘으로 독해하여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고 있죠.

니 의자 부순걸 뭘 자랑이라고 써붙혀놨어에휴

@js_caffeine, 2024년 6월 23일 오후 8시 48분 트윗

이번에 소개드린 육교 5개소 중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육교입니다. 다른 곳과 달리 주위에 사람이 머물 장소가 적거나 멀어서 한갓지고 녹음이 짙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육신묘는 육교 이후 홍살문이 나올 때까지 오르막을 한참 걸어올라가야 하고, 바로 앞은 소방서와 동작구 해병대 전우회 말고는 별다른 시설이 없어 더 쓸쓸하게 보입니다.

육교 반대편은 노량진역과 만양로 삼거리에서 출발한 ‘다운타운’이 거의 다 끝나는 지점으로 고구동산 산줄기 서벽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습니다. 그리고 고구동산 산줄기에는 재개발이 중단된 본동지역주택조합 부지가 있어 무척 휑하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깁니다.

소방서와 사육신묘와 묶어 보면, 1990년대 노들나루의 모습을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는 마지막 흔적으로 손색이 없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다.

E 지점: 가칠목 육교

노들나루에 살 적 집과 가장 가까웠던 육교입니다. 시가지가 길 안 건너고 계속 이어져 본동시장, 고구동산, 상도동 매봉로 등으로 이어지는 노들역 5번 출구 일대와 달리, 1번 출구는 한강과 한강철교, 사육신묘에 가로막혀 고립된 인상을 주었습니다. 이 노들역 1번 출구에 있었던 자연마을을 ‘본동 가칠목‘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전에도 무척 가시처럼 뾰족하고 사람 긴장시키는 이름이 낯설었는데, 실제로 마을 이름 유래가 한강이 범람했을 때 한강물에 갇히는 마을이라 하여 가칠목이라는 설과, 원래 전염병자를 격리시켜 가둬 두는 구역이라 하여 가칠목이라고 하는 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후에 만화 <절대가련 칠드런>이 한국어 약칭으로 ‘절가칠’로 불리기도 했었는데 검색결과에 뒤섞이기도 했습니다.

이 곳에서 본동초등학교로 통학하는 초등학생은 90년대 당시엔 찻길을 두 번 입체교차로 건너야 해서 무척 번거로웠습니다. 지금은 노들역 덕분에 한 번만 건너면 되죠. 그때 이 지점에 있는 육교가 가칠목 마을 사람의 유일한 통로 역할을 했었습니다. 다운타운 육교와 거의 동일한 시점인 2009년을 전후해 철거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유는 동일하게 9호선 준공 및 중앙버스전용차로 개통이었겠지요.

지금은 세기말에 유원아파트, 10년대에 래미안 트윈파크가 준공되면서 가칠목 마을의 정취는 찾아보기 정말 어려워졌습니다. 앞으로 가칠목 마을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더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비록 육교는 현대 도시계획과 시민들에게 환영받지 못하지만

중앙버스전용차로와 지하철이 등장하면서 육교는 하나 둘씩 자취를 감췄습니다. 또 이들 대중교통 시설을 통해 보행자 보행환경 개선이 법적으로 장려되면서 육교는 가능한 한 횡단보도로 대체되는 것이 오늘날 현실입니다. 실제로 같은 곳에 횡단보도도 있고 급히 길을 건너야 할 필요도 없다면 횡단보도를 건너지, 육교로 올라가고 싶은 생각은 잘 안 들기도 하고요.

하지만 다운타운 육교를 카카오 지도 로드뷰로 보고 무척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저 자신도 90년대 노들나루를 잃어버리는 주제에 그 시절 동작구와 노들나루 계승의식을 자랑하고 있었다는 부끄러움이 밀려오기도 했지요. 옛날 모습을 떠올리기 위해, 라임오렌지나무 같던 육교를 찾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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