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이 작품이 무척 참신해서 긍정평가 고점을 주는 것은 아니에요. 저는 참신함을 오히려 원하는 편이지만요. 제가 이 작품에서 긍정평가하는 요소는 바로 ‘사회와 사람들에 대한 관찰과 고증’이에요.
”일본 애만겜은 오타쿠 소굴이느니라. 이는 인간을 관찰하지 않고 작품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니라.”
라는 발언을 잠깐 인용하겠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발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타쿠는 인간관찰을 싫어하는 인간일 뿐이다(참고자료 링크)
이런 비판이 가해지는 와중에 마녀의 여행은 실제 사회의 모습을 많이 알아보고 겪은 뒤에 글로 엮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중근세 판타지의 모습을 하지 않더라도, 실제로 있었거나 그랬을 것 같은 사건과 인물들이었어요. 작품 속 이들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저 비판이 지금까지 유효하다면, 마녀의 여행은 그럼 ‘창작에 있어 어떤 자세와 준비로 창작에 임해야 하는가’의 모범예시가 될 수 있을 거예요.
작가가 원작 라노베 2권에서야 ‘사회인이 됐어요! 😆’ 라는 글을 남겼다고는 하지만, 사실 그 전에 많은 사회활동을 겪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보다 더 많이요. 많은 부분에서 보다 인싸, 또는 ‘커뮤력 높다'(붙임성 있다)고 평가되던 사람이 아니었을지. 궁금해요.
개인적으로 초등학생 시절부터 창작(글)에 대한 꿈을 가져 왔고 실제로도 몇 번 습작을 시도했지만, 주로 받던 피드백은 ‘사람을 만나고 사회생활을 해야 하느니라’였어요.
사실 기분 좋게 들을 수 있는 피드백은 아니죠. 이런 과거 때문에 저는 유청소년의 스토리텔링을 가진 창작능력을 부정하지 않아요. 눈 앞에서 그걸 부정당해야 했던 과거 때문이죠. 그러나 그렇다고 사람과 어울리고 회사나 조직생활을 하는 경험이 쓸모 없다고도 생각하진 않아요. 그것은 문학과 컨텐츠(미디어 믹스)가 가진 사회적 기능에 분명히 도움이 되기 때문이죠. 가상의 이야기는 사실 현실의 이야기를 품고 세상의 빛을 보잖아요. 현실에 던질 메시지를 가상의 장치를 꾸며 이야기하는 거죠.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가 어떻고,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이 어떤지 잘 알아야 할 수 있겠죠. 간접경험으로도 이것을 보충할 수는 있지만, 자기 스스로의 경험은 어떤 간접경험으로도 맞바꿀 수 없는 진귀한 보물이에요.
마녀의 여행은 비단 여느 간접경험으로도 채울 수 없는, 작가 스스로의 개인 경험이 집필의 밑바탕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주로 이런 생각을 하게 했던 에피소드들이 3화와 4화, 그리고 9화. 모두 딥다크한 에피소드들이긴 해요.
다 좋을 수는 없는 게 간접경험이겠지 싶은 에피소드가…7화. 상상력이 나름 재미있긴 했지만 현실보다 너무 행복했음. 단편 에피소드 둘 다.
그 외에 성적 코드를 필수요소처럼 넣다시피하는 다른 라노베 트렌드와 달리 ‘우리 아이들한테 속옷 노출은 시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라고 애니 제작에 한마디 남겼다는 점도 인상에 깊게 남았습니다.
등장인물을 성적 물화 또는 장난감화를 하긴 하는 작품인데도(e.g. 섹시한 무기 사용법 주문, 가슴 크기에 신경쓰기 등), 젠더감수성에 대한 최소한의 양심은 있는 분이라고 생각했어요. 요즘 상상하는 일반적인 라노베 작가에게는 흔치 않은 자세 같아요. 이런 자세가 좀 더 일반적인 모습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마녀의 여행에서 부정적으로 평가하고자 하는 요소라면 ‘타고난 능력과 인맥으로 사실상 정해진 시련과 운명을 맞춰 겪어야 하는’ 모습 아닐까 싶어요.
제가 ‘뛰어 봤자 벼룩’이라고 부르는 그것과도 접점이 있어요. 마녀의 여행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고 아까 혼도 카에데 필모그래피 이야기하면서 했던 도사의 무녀도, 그리고 이런 라노베 말고 사실상 일본 국민 소년만화로 대접받는 장르들에도 나타나는 특성이죠.
- ‘결국 부모에게 물려받은 자산이 최고다.’
- ‘혈통이 최고다.’
- ‘점찍어둔 인맥이 최고다.’
같은.
가업을 승계하고 사회적 지위에 순응하는 사람이 많은 일본 사회 배경이라면 극복하기 힘든 요소는 아닐까 싶기는 해요. 일애만겜 전반의 문제죠. 제가 페르소나 시리즈를 긍정평가하는 면모가 바로 이런 점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점이기도 하고요. 마녀의 여행이 이런 뛰어 봤자 벼룩 구도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은, 그런 잔인한 운명에 적극적으로 맞서는 에피소드별 주요 인물(일레이나와 사야 등 제외)의 모습을 그린 걸까요. 그런 점에서, 중요한 순간에 꽁무니를 빼고, 나몰라라 안 들려 안 보여 모드로 들어가는 일레이나 동정심은 참으로 무책임하죠.
물론 일레이나의 이런 모습과 언행은, 일레이나의 입장에서는 자기 스스로를 지키는 처세이기도 해요. 하지만 좀 더 해결사적인 면모를 가졌다면 더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보고 싶은 이야기는 방관하는 자세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친구, 우리 모두에게 도움되는 친구니까요. 아울러, 뛰어 봤자 벼룩이던 사람이 벼룩이 아닌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게 해 주는 마중물이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아요. 일레이나가요. 그 부분이 최애로서는 아쉬워요. 이런 불편한 면모와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면모야말로 역설적으로, 이 작품이 좋은 작품일 수 있게 하는 것도 같아요.
권정생 작가님도 그런 말씀을 하셨죠. ‘불편한 마음을 가슴 켠에 남기는 글이 좋은 글이다’고요.
외재적 관점의 평가가 제법 길었습니다. 😂😅
제가 작품을 볼 때 외재적 관점을 더 많이 보긴 하는 것 같아요. 그럼 두 시간 가까이 타래를 썼으니 마무리를 하겠습니다.